Wit, Learning, Wisdom
아키스는 언제나와 같은 적막함 안에 눈을 떴다. 아니지, 언제나와 같다곤 할 수 없다. 학교에 있을 때는 이 정도로 사람의 기척이 없진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진즉 출근하셨거나, 어제 들어오시지 않으셨을 테다. 주방에 만들어져 있는 샌드위치를 보니 전자의 경우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쉬웠다.
그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도 다정한 사람이다. 이제 아키스도 열일곱이 되어 성인인데도, 항상 아침을 챙겨주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아키스는 샌드위치를 천천히 씹으며 생각한다. 이 양상추는 한 블럭 너머의 고급 식료품점에서 사 온 것이라고. 항상 먹어왔던 것보다 싱그러운 채소의 향이 입 안에 감돈다. 결국 그는 샌드위치 두 조각을 다 먹지 못했다.
그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뿌리와 수원지는 누가 뭐래도 아버지였다. 어머니의 영향이 없다고도 못 하겠지만, 9살 이후로 뵐 수 없었으니 있더라도 미미할 것이었다. 마치 아버지와 완전히 닮아 버린 자신의 얼굴처럼. 어렸을 땐 어머니도 닮았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지금은 아니다. 양치하고 거울을 바라보는 입 안이 썼다. 아키스는 분명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강한 민트 향 치약을 써서 그렇다고 되뇌었다. 그래. 이것만큼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공부를 하기 위해 어제 쓰다 남은 양피지 조각을 폈다. 문득 펼쳐 본 그 글이 계속 생각했던 누군가와 닮아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오늘은 공부할 날이 아니었나보다, 생각하고 그냥 집에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오스카 와일드 동상이 있는 고즈넉한 메리온 스퀘어 공원. 아이스크림을 살까 했지만, 이내 머글 돈도 마법 지팡이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단 사실을 알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세상의 경계에 외따로 떨어진 것 같았다.
걸으면서 생각하기에, 펜은 칼보다 강하고, 자신은 래번클로 학생이다. 지식인 중의 지식인을 길러 내고, 재치, 배움, 지혜를 최고로 여기는 기숙사. 호그와트에서는 마법을 배웠지만, 하늘을 닮은 작은 둥지에서는 본성을 죽이고 이성을 벼리는 방법을 배웠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만을 하는 아버지는 배우지 못했을 것을 배웠다.
본인도 슬리데린이 아니기에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만 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 있어서는 본인이 훨씬 나았다. 칼은 합리적으로 휘둘러도 되지만, 칼보다 강한 것은 휘두르는 데 있어 합리적임만이 그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 이게 래번클로가 그에게 전해준 지혜일 것이다.
아는 것은 힘이고, 힘에겐 대가가 따른다. 앞으로 그 대가를 잘 치르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무거운 고민이 눈처럼 나린다. 재치와 지혜, 배움이 그를 배신하지는 않을까 고민한다. 그의 삶을 이루던 많은 것, 그의 사슬의 반쪽은 다정하고도 잔혹하여 그를 사랑하나 제대로 살아가진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었던가? 관련된 책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 많이 읽었어도 이건 알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는 일선에 나가는 건 못 한다. 적성에 맞지도 않고, 오러가 되고 싶던 것도 단순한 과목적 흥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미명 하에 무의식적에 판단을 유보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그의 손엔 검은 안대가 들렸다. 오롯이 그만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지, 아직 고민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게. 아직은, 아직은 괜찮아.”
오늘도 끝끝내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결론 내리는 것을 미루었다. 이리 할 수 있는 특권도 올해가 마지막이니, 끝까지 누리리라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혼자 늘어놓고는 웃는다. 같이 웃어줄 이 없는 웃음이 허공에 비산한다.
독수리는 가장 오래된 둥지를 떠날 준비를 한다. 아키스는 그날 아주 오래 밖을 거닐다 들어왔다.